예술 작품과 Ideal, Virtual, Real – 이창훈 작가론

예술 작품과 Ideal, Virtual, Real – 이창훈 작가론

신현진 (예술학 박사)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데카르트는 후대의 인간이 생각의 세계, 즉 virtual의 세계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집에서나 전철 안에서나 하루 종일 액정 모니터가 보여주는 가상의 시-공간을 드나드는 우리의 삶은 점점 더 virtual 세계와 가까워지는 것이 확실하다. 이창훈의 예술세계를 엿보려는 지금 이 순간도 필자는 가상의 세계인 이창훈의 웹사이트를 찾아가 작품의 기록을 보는 일이 실제real 미적 체험인양 굳게 믿으면서 이 여행기를 시작한다.

ideal은 어디에 있을까?

처음에 찾아 간 작품 <찬란하게 흩어져 다시 우주로 (지구로)>는 팔찌에서 분리한 구슬을 바닥에 삼각형으로 진열한 작품이다. 비즈beads의 어원은 (원하는 바를) 빌다를 뜻하는 bidden, bade 에서 왔다고 한다. 수녀님의 묵주가 그러하고 스님의 염주가 그러하고 몇 년 전 연인을 원하면 분홍색의 구슬 팔찌를 차는 것이 유행했던 것도 그러하듯이 구슬을 ideal에 대입하는 작가의 주장은 잘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작가는 전시장에서 그의 구슬을 집어가는 이들이 이상ideal을 하나씩 품고 집으로 돌아간다고도 했다.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가 연상된다. 곤잘레스-토레스는 <무제>에서 죽은 연인의 덕목virtue이었던 sweet함을 관객이 품고 돌아가기를 기원하면서 전시장에 구슬 사탕을 쌓아 두고 이를 가져가도록 했었다. 그렇다고 곤잘레스-토레스의 논리 구조와 이 작품의 구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거리감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Ideal한 연인의 sweet함은 사랑이라는 것을 한번쯤 경험해봤던 사람이라면 이미 그 사람의 머리 속 생각의 세계에 들어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이상idea은 저 멀리 레테의 강 건너편 형이상학의 세계에 있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형이상학의 세계에 있던 ideal이 경험real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빌고 빌어서 구슬이라는 형상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져야 했다. 그러니 구슬이 삼각형으로 놓였다고 해서 누구나 구슬을 ideal의 결정체로 해석할 확률은 머리 속virtual의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와의 거리만큼 멀어 보인다. 거리가 가까워야 할까?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Ideal과 개별 관객의 미적체험, 혹은 ideal과 real 사이의 삐걱거림을 진리의 실패로 삼는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의 징후인 것이다. 적어도 지금부터 논의할 이창훈의 예술세계의 정합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래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번째 열어본 작품의 원 제목은 <레드 타임_매달 순차적으로 올린 12개의 깃발> (2016.09~ )이었다. 양평의 두물머리 근처 너른 들판에 무늬 없는 붉은 깃발을 매월 하나씩 순차적으로 올려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붉은 색이 탈색되어가는 정도를 대조하려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완으로 끝나고 <미완의 프로젝트>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붉은 깃발로 연상되는 의미들로 해서 민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의 민원이었을까? 나는 깃발이 붉은 색이라고 해서 지역민이 종북좌빨을 연상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가상세계인 인터넷으로 가서 양평의 두물머리를 서치했다. 이 지역 주민은 MB의 4대강 사업에 맞서 투쟁 끝에 생태 공원을 조성하기로 정부와 타협을 이루어 냈으나 정작 정부가 운영을 책임지지 않겠다고 나오는 중이라는 뉴스를 발견했다. 이들이 함께 이루어낸 “타협된 ideal”은 결국 정부의 배신으로 끝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깃발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망각을 선택한 보수 집권당의 붉은색을, 탈색되는 약속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했기를 바라기로 했다. 이전 작품에서 Ideal을 다루었던 이창훈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ideal을 다루고자 했을까? ideal과 real 사이의 삐걱거림을 시간에 연결하고자 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의 ideal이 영원 불변하는 것이라면 굳이 시간이 지남에 따른 차이에 주목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미완으로 끝난 일이 얼마나 행운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전부터 <있음에서 함으로>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인터뷰 책인데 저자가 인지 생물학자인 마뚜라나에게 그의 연구가 “경험적 인식론”이냐고 질문 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인식론은 영원불변의 이상, ideal, 진리를 고정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인식론에 경험적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것은 플라톤의 작업과는 달리 마뚜라나의 작업엔 경험세계의 작동을 수렴하느냐는 질문이 된다. 오홋! 더 읽어보니 “인식 활동이 세계를 산출한다”는 명제도 나왔다. 아리송했다. 좀 더 읽어보니 눈의 맹점과 같이 불완전한 신체를 가진 인간은 외부세계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어서 생각을 통해 보정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의 메커니즘을 따라가면 인간이란 선험적 진리를 우선으로 놓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경험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생각을 통해 나중 에서야 진리, 비-진리로 결정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결정이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는 그의 결론과 만나게 된다. 결국 진리는 인간에게 규범이나 행동강령을 내려주는 저 높이, 형이상학의 세계에 있는 권위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머리 속에, 생각하는 활동 그 자체가 원인이 된다. 달리 말 하자면 마뚜라나의 논리는 생각이라는 virtual의 세계에서의 활동이 ideal에 수렴되는 세계관이다. 어쩌면 이창훈 작가가 만들어가는 예술과 철학이 산출하는 ideal 또한 영원불변의 이데아적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탈색도 가능한 시간에 위치한다는 확신에 너무나 반가웠다. 더구나 이번 작품에서 그는 마뚜라나와 유사하게 경험론적 인식의 과정이 작품이 제시한 ideal의 형상에 반영하였다. 달리 말 하자면, 그의 작업은 첫 단계에서는 형이상학의 idea가 형상화된 붉은 깃발로 제시되었다. 이어서 real 세계를 살아가는 두물머리 주민들의 인식활동을 통과하였고 주민들이 생각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민원이라는 경험세계의 작동시스템에 의해서 붉은 깃발이 없는 실제 세계를 산출해 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탈색되는 <레드 타임>을 표현 하고 싶은 작가에게 이보다 더 뜻 깊은 경우가 있을까? 레드라는 모호한 idea가 경험세계에서 작가와 작품, 주민의 인식활동이라는 virtual 세계에서의 시간을 담아내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작품이 미완으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예술작품이 경험세계에서 겪는 시간의 궤적은 논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시간이 많습니다

다음에 본 작품 <원을 베어버린 사선>은 이전 은평구 보건원 단지가 이사를 나가고 그 자리에 혁신 파크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원주민이 버리고 간 달력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사진 연작이다. 달력은 당연히 과거의 날짜를 보여주고 있었다. 작가는 여기서 외부 사회와 단절된 차원의 시간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았다가 지금은 잘려 나간 시-공간이 작가의 시간과 만난 셈이니 ideal과 real 세계 사이에서의 시간에 대한 철학이 여기서 더 깊게 다뤄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이 시간에 관한 것이라는 해석의 근거는 작품의 소재부터가 시간을 알려주는 달력이기도 했지만 작가의 이전 작업 <리셋 머신>에서 왔다. 시간이 리셋 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작품의 설명에서 작가는 일상 속 반복적 행위에서 생산된 시간을 “원형으로 순환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명명했었다. 이창훈 작가가 시-공간을 다루는 입장은 무척 특이하다. 그에게 시간이란 물리적으로는 원형으로 닫힌 모양이자 사선으로 베어질 공간까지 포함한다. 사회적으로는 우리가 합의하고 표준화 하여 따르는 시간과 결이 어긋난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을 포함한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달력이 표기하는 시간과 촬영된 시간 사이가 진공의 틈이며 이는 관객이 감각의 차원에서 느낄 비시각적 시간의 질량이라고 규정한다. 시간의 질량이니 감각의 차원이니 그리고 시간을 베어버린 다니. 여느 작품처럼 재개발이나 정책과 같은 사회문제가 주제라고 단정하기엔 너무나 추상적인 설명이다. 동시에 과학의 언어도 감지된다. 혹시 양자역학인가? 필자는 리셋 되고 동시에 베어져 독립적인 시간이 여럿 공존하는 개념에서 양자역학적 시-공간관, 더 나아가 세계관을 상상했다. 작가의 철학은 양자 역학의 시-공간, 즉 다중우주를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른다. 양자 역학은 빛이 파동이자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더구나 빛이나 원자가 언제 입자로 행동할지 파동으로 행동할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파동이거나 입자일 확률 뿐이다. 다만 입자/파동은 관측되는 순간 입자가 되고 그제서야 특정 시-공간으로 고정된다. 이를 발전시킨 초끈이론은 확률의 모든 가능성에 따라 각기 다른 미래, 즉 우주가 생성되며 결과적으로 세상에는 기하급수적인 숫자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필자는 시간의 <원을 베어버린 사선>인 달력 작품은 작가가 달력을 관측함으로써 깨달은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관객이 감각하게 하려 한 시도라고 해석했다. 그에게 시간은 다중적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다중의 시-공간를 향해 여행을 떠나보자고 한다. 그의 시-공간 여행 머신은 달력이다. 한번은 <달력-헤테로크로니아>로 또 한번은 <수평적 리셋>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달력>은 2026년 달력을 2016년에 사용해 보자는 제안이었고 <수평적 리셋>에서는 선적 시간관과 원형적, 순환적 시간관의 차이를 비교하는 작가의 에세이가 함께 여행했다.

확률로서의 ideal

우리는 이제부터 지금까지 논의된 ideal과 real의 삐걱거림, 삶이나 바라건대 virtual 세계에서의 생각활동을 수렴하는 시간관, 다중적 세계관이 real 세계에서의 그의 예술에 어떤 여파를 야기하는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시-공간은 다중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인도하는 시-공간이 문어처럼 생긴 에일리언이 사는 환상의 세계는 아니다. 혹은 양자역학을 뉴 에이지에 연결하는 사람들처럼 “도를 믿으십시오”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예술은 종교와는 다르고 경험세계와의 거리감으로 비교하자면 종교는 형이상학 세계에 더 가까우니까. 그의 다중적 세계는 양자론의 다중우주에 더 가깝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확률이라는 키워드로 꿰맞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양자 역학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 확률 부분이다. 다중의 시-공간이 공존할 가능성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우주가 그리고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우주는 확률에 의해서 생산된 무한수의 우주 중 하나에 우연히 다다른 것일 뿐이다. 한편, 양자론의 확률은 입자거나 파동일 확률이라는 정확하게 계산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단지 예측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거나 주관적인 시점에 따라 가치판단이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적 주체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그의 예술은 우리가 여행할 수도 있었던 과거와 되돌아보는 미래로서의 <예측 가능한 불확실>성의 범위 안에 놓인다. 그의 작품 <예측 가능한 불확실>은 칠판을 테이블의 상판으로 1년간 사용하고 칠판에 남겨진 생각과 활동의 흔적들을 책으로 엮은 작품이다. 우리는 책상에 어떤 자국들이 남을 가능성이 있는지 확률로 알고 있다. 확률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 가능한 복수의 결과물을 계산하는 것이지 답을 정하는 일과는 다르다.
필자가 추측한 이창훈의 철학이 맞는다면 그의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일 또한 확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적체험의 시공간 또한 확률로만 예측 가능하다. <레드 타임> 작업에서도 우리는 주민이 붉은 깃발을 빨갱이로 해석했는지 혹은 집권 보수당의 상징색으로 해석하였는지 알 수 없다. 현실이 고정된 지금. 작가는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업이 제작되기 이전에 해석의 여지는 이미 빨갱이 이거나 보수당의 상징색이라는 확률만 존재했고 작가가 이를 미리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인간이 가진 의미의 그물망에서 어느 것을 관객이 선택해서 해석할 것인가는 확률로만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불확정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형이상학 세계의 붉은 깃발이라는 ideal은 주민-관객의 미적체험 과정에서 virtual 활동을 수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붉은 깃발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적어도 두가지의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작가는 “단지 순수한 시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작업이 관념의 세계에만 머물게 하려 하진 않는다. 작업은 우리의 삶을 가로질러 real을 반영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되고 해석되어지 길 기대한다”고 작가노트에 밝히고 있다. 예술이 확률일 때 ideal 세계만큼 현실과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작품의 소재와 메커니즘이 (비평가를 포함하는) 관객이 (작가가 결정한 의도의 이해가 아니라) 기꺼이 생각을 해주고 어떤 해석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필자는 관객에게 인식활동을 요구할 수 있는 관객과의 설정이 작품에 들어가는 것이 해답은 아닐까 감히 제안해 본다.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면 생각 활동은 이제껏 실패를 담보해온 ideal에 수렴되어 마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