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거룩한 시간

이창훈, 거룩한 시간

민병직 (대안공간 루프, 협력 디렉터)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순환과 또 다른 이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시간,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과 연동된 이질적인 공간에 관한 작가 특유의 단상들이 펼쳐진다. 이번 전시에서의 이창훈 작가의 ‘거룩한 시(공)간’이라는 화두는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하는 계절감만큼이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묵직한 의미들을 재차 곱씹게 한다. 그저 순차적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특정한 의미들로 다시 전유된 것들로서의 시공간의 의미들이 전해지고, 여기에 겹겹이 적층된 작가의 고민들이 더해져 그 각별하기만 한 사유의 속내들을 못내 공감케 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우리의 바쁘기만 했던 시공간들을 잠시 멈춰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원형의 두 공간이 서로 이어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실의 공간적 특성에 맞춰 각각 공간, 시간에 관한 작가의 단상들을 펼치고 있는데, 작가의 시간성에 관한 독특하기만 한 사유를 살펴볼 수 있는 작업이 오른쪽 전시공간의 원형 벽면을 둘러싸고 설치된 <원을 베어버린 사선>이다. 이 작업은 흐르는 시간의 마디를 잠시 비껴서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시간이 가진 갖가지 묘하기만 한 속내를 드러낸다. 달력의 기호적이고 정보적인 특성상 그것이 어느 한 시절의 시간들을 전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의 빛바랜 시간들을 담고 있기에 현재의 시점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시간의 의미들이 탈각된 어떤 과거의 흔적들일 뿐이다. 특정한 시간 대신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진, 지나간 과거의 퇴색한 일상의 기억들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 시간이 잠시 동안 점했을 삶의 어떤 속내들이 가시적인 사물로서 전해지는 것이다. 특히나 재개발 지역의 폐허 같은 곳에서 수집된 달력들이라 더더욱 그 무상하고 허망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절단함으로써, 다시 말해 원형적인 순환의 시간은 물론 선형적인 흐름의 시간을 차단하여 시간을 현실의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이미지들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삶의 시간이라는 어떤 묵직한 현실감 혹은 구체적인 질량감 같은 것들로 말이다. 이는 작가의 시간성에 대한 관심이 시간에 대한 개인적인 감각인식을 매개로 구체적인 사회적 시간들로 연결되는 것들이기도 하고, 동서양의 순환적이고 선형적인 기존의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시간성과도 다르게 맞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숱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었음직한 재개발 지역의 시간의 마디를 벗어난 오래된 달력들은 시간의 차원이 단지 어떤 정보의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경험, 무의식이 복합적으로 반복 교차되고 축적된 것임을 드러낸다. 과거의 시간들이지만 현재에 의해 다시 재구성된 시간성이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한 느낌들을 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고, 그렇게 덧없는 시간의 무상성에 대한 토로일 수도 있겠다. 더욱이 재개발, 재건축을 반복하며 또 다른 순환과 직선적인 발전논리를 거듭하는 우리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지나간 세월의 아련한 흔적들로 향하게 한다는 면에서 작가의 시간에 대한 관심이 개념적인 것에 앞서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것들임을 확인하게 한다. 익히 알고 있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각각의 달력들이 지시하고 있는 실재적 현존의 시간들, 그 시간들이 향하고 있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공간들을 향해 말이다. 이러한 시간 혹은 공간에 관한 작가의 감각적인 면모가 도드라지는 작업이 <리셋 머신>이다. 한가로운 지루한 일상의 단면들이 정적인 움직임으로 느리고 길게 이어지는 이 작업은 이번 전시의 화두인 ‘거룩한 시간’의 속내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재개발 현장에서 채집된 이들 영상들은 마치 시간의 움직임이 멈춘 듯, 길고 느린 화면을 불연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속절없이 지속되고 있는 시간에 관한 작가의 감각적 사유를 직접적으로 가시화시킨다. 시간은 그렇게 느린 듯 빠르게, 혹은 빠른 듯 느리게 멈추는 듯 다시 흘러간다. 여기서의 시간성은 객관적인 시각의 단위의 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 것이고, 그 경험의 빛깔과 질감들만큼이나 각기 다른 느낌들로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시간의 경험 속에서 현재는 다시 과거, 혹은 미래와 섞이기도 하고, 그렇게 섞인 시간대들을 감각적으로 중첩시켜가면서 각자만의 시간 감각을 경험해 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시간의 흐름은 각자의 경험적이고 성찰적인 시간에 대한 감각들, 사유들로 전환된다. 특히 작가는 이러한 각각의 시간에 대한 독특한 성찰을 위해, 온돌 매트, 비닐장판, 구형 모니터 화면 같은 관람 장치들을 통해 한 겨울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의 나른한 상태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지난 시간들을 천천히 완상케 하도록 배려한다.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멍한 상태로 일상의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시공간의 흐름에서 잠시 비껴서 있는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반추하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리셋, 곧 각자만의 고유한 시간대로 다시 맞추는 것이야말로 세속의 시간들마저 거룩한 시간들로 변모할 수 있는 어떤 태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움직임마저 정지시키는 것이고, 정지된 순간조차 다시 삶의 리듬으로 이어가게 하는, 정중동, 동중정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끝없이 돌고 도는 일상의 원환 같은 시간의 순환에 파열을 내는 것인 동시에 단선적인 방향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절단하면서 각자의 고유한 감각적인 시간을 생성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더욱이 이 작업은 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원을 베어버린 사선>과 조응하면서 불연속적인 시간의 마디가 공간의 차원, 그 가시적인 기억, 흔적들의 이미지들과 함께 결합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아련하고 덧없는 삶의 시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반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시간, 공간들을 스스로의 감각들로 재전유하여 일상의 시공간을 다시금 돌아보길 권하는 작가의 권유는 한 해의 말미, 계절의 끝자락에서 마주할 수 있는 꽤나 의미 깊은 화두가 아닐까 싶다.

시간은 아니 각각의 삶은, 그렇게 일상의 사소한 것들조차 흔적이 되고, 기억이 되면서 짧지만 긴 흐름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불확실하기만 한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더욱이 파편적이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4년도에 태운 2015년>은 2014년도에 날마다 태운 담배 흔적으로 2015년도의 달력을 만들어 이를 책으로 만든 작업이다. 미래의 시간을 과거의 작가의 반복적인 일상의 흔적으로 만들어낸 이 작업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 자신의 불확실한 과거의 일상, 미래의 불안정한 삶에 관한 기록이기도 한데, 과거와 미래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가 맞물려 있고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면에서 평범한 일상적 경험들조차도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개념적 접근들로 실험하고 문제시하는 작가 특유의 면모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그동안 줄곧 모순적인 상황들이 맞물려 있는 현실을 통해 특유의 문제제기를 이어왔다. 현실과 상상, 있음과 없음, 실상과 허상, 진실과 거짓 등 이항대립적인 현실의 특정한 상황들에 대한 개념적 개입을 통해 아이러니한 현실의 이면들을 들추어내 온 것이다. 시간에 대한 접근도 비슷한 맥락에서 접근되는데, 이번 작업의 경우도 서로 다른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적인 시간대로 이질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이른바,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의 시간성 개념이 떠올려진다. 사실 개념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일상의 현실 시공간이 종종 오히려 더 역설적으로 다가옴을 종종 확인한다. 이항대립적인 면모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맞물린 시공간 개념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제안하고 있는 거룩한 시공간 개념도 사실 감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에 의해 재 전유된 세속적인 시공간성이기도 하다.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시공간이 사실 더 모순적으로 다가오는 법이고, 작가의 작업도 이러한 현실이 머금고 있는 긴장과 역설의 팽팽한 감각과 인식을 기반으로 개념적인 것들, 보다 본원적인 것들로 다시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평범하고 세속적인 일상의 시공간성마저도 반성과 성찰의 거룩한 대상들로 감각 사유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공간에 관한 사유도 이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펼쳐진다.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하는 <낙원>은 낙원동 일대에서 펼쳐진 프로젝트의 현장 설치 작업이기도 한데, 낙원, 곧 현실에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 현실적인 지향으로서의 파라다이스라는 역설적이고 이질적인 공간, 장소를 상기시킨다. 도심 한 복판, 근현대의 지층이 겹겹이 쌓인 낙원동, 음악관련 상가들이 즐비한 낙원빌딩의 장소적 맥락과 연동시켜 건전가요 음악이 나오는 스피커들로 낙원이라는 점자 형태를 설치한 이 작업은 결코 낙원일 수 없는 비루한 현실 속에서 이상적인 낙원을 향해 동경하는 우리의 모순적인 현실성을 드러낸다. 점자 형태의 작업이지만 정작 이를 촉감으로 만져 접근하기에는 용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낙원에 대한 강요된 찬가라 할 수 있는 건전가요만이 나오는 역설의 공간성을 적절하게 가시화시킨다. 불확실하고 어긋난 것들이 파편처럼 얼기설기 구성되어 있는 사회적 현실도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감각경험도 어쩌면 이처럼 헤테로한 방식(hétérotopie)으로, 곧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맞물린 채 공존하고 있음을 작가는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과 역설은 작가가 현실을 경험하고, 또 개념화시키는 주요한 매개 고리가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도 현실의 시공간은 단일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감각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작가의 시공간에 대한 인식은 작가의 구체적인 경험, 솔직하고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개념적인 의미들이 덧붙여지는데, 귀납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생생하기만 현실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들이 이질적으로 더해지는 방식이기에,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해석과 접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시도된 <파라다이스>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혀질 수 있다. 파라다이스를 의미하는 점자를 전구로 만들어 왼쪽의 전시공간에 설치된 이 작업은 이전 작업들처럼 기본적으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공간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접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점자 형태로 형상화되었지만 직접적인 촉감으로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그 가시화된 형상, 이미지조차 환한 빛 속에서 눈부심으로 결국은 따뜻한 온기와 분위기로 접해야할 뿐 아니라, 이렇게 이질적이고 낯선 공간 경험을 통해서 파라다이스라는 역설의 의미를 생각하게 끔 하기 때문이다. 촉각적인 경험이어야 할 점자를 비가시적인 형식의 빛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가시화시키고 있는 것인데, 이는 다시 현실 너머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상향, 그리고 현실에 모순적인 강요된 방식으로 자리하는 파라다이스의 역설적인 의미까지 더하면서 그 모순적인 상황이 더욱 극화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중층적으로 맞물려 파라다이스의 개념적인 모순성이 더욱 강화되고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은 개념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함, 모순, 다층적인 면모들을 지극히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것들로 전한다. 그렇게 작가의 시공간에 대한 인식, 혹은 접근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동시에 개념적이고 관념적이다.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동시에 이상적이다. 이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것들로 연결시키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기만 하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 역시 두 개의 원형 공간을 잇는 전시장의 공간적 배치의 면모를 공간과 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하지만 서로 맞물릴 수밖에 없는 작가의 감각적 인식의 장으로 가시화시킨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시간을 절단하고 가로질러 불연속적인 흐름으로 펼쳐지는 현실적 시간성의 속내를 펼쳐낸 오른쪽 공간이 작가가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간성의 이미지인 동시에 시간의 공간화를 보여준 것이라면, 왼쪽 공간은 좀처럼 닿기 힘든 이상향으로, 또 다른 현실로 자리하는 양립 불가능한 공간성을 가시화시키는 동시에 공간의 시간화를 드러내고 있다. 현실의 실재 시공간이 그런 것처럼 이번 전시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시간,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공간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들을, 혹은 이에 대한 작가의 속 깊은 전언들을 전시공간의 건축적 배치를 적절히 활용하여 마치 다이어그램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시공간은 매순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그 깊은 속내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좀처럼 그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것들을 향해 애써 닿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 자신의 솔직하기만 한 스스로의 존재론적인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일상 속에서 감각 경험한 것을 통해 이를 작업들로 개념화시킴으로써 시공간의 개념 또한 일상적인 성찰의 대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의 작업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는 이에 대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면모들은 어쩌면 현실의 속내와 외피가 갖는 이질적이고 묘한 속성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개념적이기에 앞서 감각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존재의식과 밀접히 연동되어 있다. 스스로의 솔직한 감각적인 삶을 기반으로 한 사유들이었기에 복잡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고, 이번 전시가 전하는 것처럼 세속의 시공간들마저도 모순적이지만 거룩한 것들로 반추하고 성찰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숱한 사건들로 얼룩져 있는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왠지 그 울림들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